실험실에는 군대 문화의 잔재로 강하게 추정되는 문화들이 존재한다. 후진 문화다.
어휘가 전투적이다. 몇 시에 무엇을 타고 갈지 교수님과 "쇼부를 쳐야" 한다. 역 주변 정보를 제대로 알아가지 않으면 교수님에게 "당하"기 때문에, 교수님이 "치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역 주변 사진과 간단한 지형을 공부해가야 한다. 랩장을 비롯한 몇몇은 "아래 애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몸소 하기 귀찮은 일들을 '아래 애들'에게 넘긴다. 웬일인지 나에게는 별로 그 "부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신입생들은 "바쁘냐?"라는 말에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자주 부탁을 받던 신입생이 없던 야심한 시간에 A선배가 내게 부탁을 했다.
"XX야, 내일 중앙창꼬에 볼펜 쫌 주문해라. 파란색으로… 또 뭐… 아니다, 파란색만 주문해라."
이 대사 읊을 시간과 정력으로 전화기 들고 관리팀에 얘기만 하면 되었을 일을, 뭐하러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지 모를 일이다.
군대는 다녀오지도 않은 B도 이런 문화 속에서 못된 버릇만 배워간다. B는 어제 랩미팅 직전 후배인 C형에게 "부탁"을 했다.
"형, 바쁘세요? 저 랩미팅 가야되는데 신문 쫌 가져와줄 수 있으세여?"
"어, 나 스터디 해야되는데…"
랩미팅 가는 길에 집어가면 될 것을, 굳이 다른 사람을 시킨다. B는 가끔 내게 출력을 부탁하기도 한다.
"XX야, 내가 지금 파일 보낼 테니까 그거 출력 쫌 해도."
파일 보낼 시간과 클릭할 노력으로 제가 출력을 하면 될 것을 굳이 파일을 보낸다.
이런 양상은 내가 오기 한참 전부터 형성된 이 사람의 일부이며 탈옥수마냥 포크로 석벽을 긁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이 손톱을 물어뜯는 것을 보고 '너는 왜 손톱을 물어뜯냐'고 묻는다면 서로 민망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 한번은 그 민망함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서 물었다.
"B야, 아까 그건 왜 프린트해달라고 한 거야?"
"아, 아까 그거 말이가. 보고할 때 필요한 거다."
"혹시 니 컴퓨터 프린트가 안되거나 그런가?"
"아니? 잘 되는데?"
B의 순진한 눈망울을 보고 자신이 어떤 습관이 있는지, 무엇을 닮아가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그 일이 수행되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홀쭉한 정신을 달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니면 그냥 별 생각이 없는 걸까? 어느 쪽이든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런 구도 안에서 스트레스는 증폭된다. 떠넘겨진 일은 줄 때는 한 줌이지만 받을 때는 한 더미가 된다. 평소에 했으면 재미있을 일도 시켜서 할 때는 지루하기 마련인데, 남이 싫어서 넘긴 일이라면 그것은 고역이 된다. 그리고 소름끼치게 자신과 접해있는 사람들을 닮아간다.